안녕하세요! 복습하는 물리치료사 올선입니다.
오늘은 시타와 와훌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시타와 와훌라의 TED강연, <내가 뇌전증을 겪는 삶에 대해 말하는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실까요?
시타와 와훌라는 평범한 청소년이었습니다.
17세 이전까지는요.
17세부터 어떤 문제를 겪게 됐는데,
흔히 그 나이에 겪는 문제들, 이를테면 쉽게 긴장하는 편인 성격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지요.
‘이 이야기가 달콤한 사랑고백을 받았다든가 하는 이야기였다면 좋았겠지만…’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시타와 와훌라는 이 강연의 다음과 같은 진지한 주제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보냈던 시간들입니다.
어째서, 어째서 나여야 하는가.”
시타와 와훌라는 인생 처음으로 뇌전증이 시작되었던 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고 우리반이 체육 시합에서 이겨서 학급 친구들과 함께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샤워를 하러 갔지요.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제 치아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숟가락을 입에 넣을 수도 없었죠. 보건실로 급히 갔습니다. 저는 말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입을 가르켰습니다. 보건 선생님은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셨고 그래서 일단 저를 눕혔습니다. 그러자 좀 나아졌습니다. 몇 분 후 치아가 부딪히는 것은 멈췄지요. 저는 서둘러 나가려는데 선생님은 안된다고 하시며 기숙사로 가서 자야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에 저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고 마지막 시험을 몇 달 앞두고 있었습니다. 며칠 뒤에는 제가 사는 케냐의 '목스'라는 시험 봐야했죠. 그 시험은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에 대비하는 모의고사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자러 갈 수가 없었죠. 남은 시험들이 저를 옥죄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교실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고 케냐 역사 공책을 폈습니다. 케냐의 해안가 마을인 기리아마에서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메카틸릴리 와 멘자'에 대해 배우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예고도 없이 저의 왼쪽 손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제 손은 마치 시험지에 답을 표시하는 것 같은 모양이었죠. 수시로 반복되었고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반 친구들은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저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멈춰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한 번 발생할 때마다 끝나는 주기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이것이 뇌전증 증상이라는 본격적인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15년 동안 저를 괴롭혔던 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
시타와 와훌라는 뇌전증의 대표적인 증상인 발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로 집이나 병원에서 지내야했고, 기말고사를 보러 학교에 간 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시험중에도 발작이 발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련들도 시타와 와훌라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가까스로 좋은 성적을 받은 시타와 와훌라는 나이로비 대학의 보험통계학과에 합격했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지만,
시타와 와훌라는 다시 한번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불행히도 2학년때 자퇴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일자리를 얻게 된 후에도, 직장에서 발작을 한 번 일으키자 곧 해고되었습니다.
시타와 와훌라는 자신의 인생에 닥친 시련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정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어째서?”
생각이 떠나지 않았죠.
뇌전증 환자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도 없고, 혼자서는 여행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극심한 스트레스는 시타와 와훌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수록 발작은 더 심해졌고, 어떤 때는 간질 발작을 겪고 2~3일 후에도 머리와 손에 경련 증상이 남아있었습니다.
좌절감으로 고통을 받던 중,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타와 와훌라의 글은 주변 사람들이 답해주지 못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타와 와훌라가 느낀 고통과 의문, 좋았던 날들, 나빴던 날들과 이 모든 것을 블로그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은 뇌전증을 겪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들과의 소통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끈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뇌전증 환자가 아닌 사람들과도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시타와 와훌라의 말처럼, 끊임없이 “왜 저인가요?”를 묻던 소녀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시타와 와훌라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게 도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타와 와훌라는 하루에 두 세번 발생했던 발작이
1년에 두 세 번으로 횟수가 줄었습니다.
더 나아가 5명의 직원을 고용한 케냐 최초의 무료 정신건강과 뇌전증 환자 도우미 센터를 시작하였습니다.
시타와 와훌라는 현재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환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인식을 변화할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합니다.
시타와 와훌라는 다음과 같은 말로 강연을 마무리했습니다.
“매년 전 세계에서 나이로비 인구의 80% 정도 되는 사람들이 뇌전증으로 진단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그들도 낙오자나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감정들로 고통을 겪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 계속 대화를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제 문제를 계속 고백할 것입니다. 뇌전증 환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게 되겠지요. 그리고 계속 일깨워주고 싶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함께 지내도 괜찮다는 것을요. 그리고 뇌전증 환자들 스스로가 낙오자 혹은 외톨이가 되었다는 마음의 벽을 없앤다면 우리 역시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어떤 일들도 해낼 수가 있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월 26일은 퍼플데이, 뇌전증 인식 개선의 날이었습니다.
뇌전증환자들이 ‘할 수 있는 것’,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누어 놓은 선은
실제하는 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었던 것이 아닐까요?
요즈음에는 점차 뇌전증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가고 있습니다.
때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나오기도 하며, 주변인물들과 화합하고,
편견 어린 시선에 의해 차별 받지 않도록 보호받기도 합니다.
이 강연을 들으면서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
또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셨나요?
저는 시타와 와훌라가 깊은 좌절에 빠졌을 때 계속 자기자신이 좌절감속에 빠져있도록 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 밖으로 나오게 이끌었던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마음 속 내면의 질문을 찾기 위한 글쓰기였지만, 긍정적인 나비효과를 가져와 더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미디어에서도, 강연에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그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 때를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시타와 와훌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싶으시다면
TED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보세요! 직접 듣는 강연의 감동을 느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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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homebound by epilepsy, mental health advocate Sitawa Wafula found her strength in writing about it. Now, she advocates for others who are yet to find their voices, cutting through stigma and exclusion to talk about what it's like to live with the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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